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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a, Depression, And Mourning (트라우마, 우울과 애도)

참자기 2014-06-08 (일) 17:02 10년전  
Trauma, Depression, And Mourning
Jörg Bose, M.D.  / 제1회 상실과 슬픔, 애도 (세월호와 정신분석) 포럼
 
외상이 실제로 정신병리의 핵심적인 병인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재고찰하게 되면서 정신분석에서 외상에 대한 논의가 한번 더 이루어졌다. 이것은 임상 현장에 새로운 관점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우울은 외상 후 임상 증후군에서 두드러진 증상 중 하나로 종종 열거된다. 나는 여기서 우울증이 외상 상태를 기억하고 회복하는 결정적 과정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하며 그것이 이미 어려울 수 있는 애도 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방법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나는 때로는 우울증이 견딜 수 없는 외상 경험을 담아낼 수 있게 하려는 성인 자기의 해리적 노력의 일부라는 모델을 제안하고 싶다.
확실히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든 엄청난 끔찍스런 외상 경험이 없었던 때가 없었지만 우울 및 상실과 관련된 문헌에서 외상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드물게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사용하고 싶은 외상의 정의는 외상이 자기애적 상처로, 특히 자기를 산산이 부수는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일관적인 감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Ulman & Brothers, 1988).
대인관계적 외상-다른 사람들에 의해 겪게 되는 것으로 서서히 이루어지는 학대-의 영향을 온전히 평가하기 위해 자기애의 개념을 고전적인 구강성 모델 너머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예들 들어 설리반 학파에서 타자에 의해 동의된 타당성 개념, 혹은 코헛 학파에서 긍정적 자기대상 기능 개념에서 개인의 발달과 자기 유지에 타인에게 더 많은 역할을 주면서 말이다. 그때 외상은 자기나 타자들 그리고 환경에 의해 제공되는 모든 자기-양육적(self-nurturing), 기능적 자원이 파괴되는 끔찍스러운 경험으로 정의될 수 있다.
우울증은 애도과정 장애로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외상이 애도할 수 있는 능력과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의 연구는 새로운 통찰을 만들어낼 것이다. 내가 개진하고 싶은 주제는 애도 과정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현실은 우울증에 의해 즉 우울한 마음 상태의 특징인 고발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통해 만들어진 자기와 타자들에 대한 우울 시각의 회피적 사용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paranoid-schizoid position(편집 분열적)에서 depressive position(우울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달적 성취하고 말하는 멜라니 클라인의 영향을 받은 정신분석 전통과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paranoid 포지션은 인류의 발달에서 첫 번 단계일 수 없으며 대신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순진하며 원초적인 대상-사랑이 인류의 발달에서 생후 첫 단계로 생각되어야 한다”(Balint, p. 263)는 발린트의 주장을 따르고 싶다. paranoid와 depressive 반응 모두는 발달 단계라기 보다는 그런 일차적 대상 사랑의 초기 외상적 좌절에 대한 병리적 반응으로 보여진다.
초기 외상의 결과로 생긴 인격 장애의 전형적인 예로 생각되는 경계선 환자들은 예컨대 클라인 학파의 전통에서는 슬퍼할 수 없는 그리고 슬퍼하고 싶어하지 않는, 대신에 악의적인 내사물들의 내적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환자들로 생각될 것이다. 이 모델에서 환자들이 나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depressive 포지션에서 경험되는 공포, 상실, 슬픔 그리고 열망의 강렬한 정서들은 양가감정에서부터 도망쳐서 대상을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분리시키는 것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대신 나는 우울적 자리로 도망가는 클라인학파의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외상화된 환자들은 극악하고 비인간적인 환경과 정서적으로 만나는 것을 회피하고자 우울증으로 도망간다고 제안하고 싶다. 외상을 입은 환자는 세상을 위험한 곳으로 지각하면서 경험적으로 paranoid 포지션에 머물러 있는 거 같다. 그러나 이런 투사들은 분열된 대상 표상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실제 나쁜 경험의 결과이다. 그런 경험과 관련된 심리적 포지션은 완전한 기억상실증에서부터 앎에 대한 다양한 부분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다.
외상의 병리적 역할의 중심성을 재고찰하면서 분열 보다는 해리가 가장 적절한 임상 현상이 되었다. Ferenczi(1932)는 해리 상태를 전체적(whole)인 인간의 해리, 즉 학대 장면에 있는 아이로 말하고 있다. Herman은 아동기 외상의 생존자들에게서 해리가 인격조직의 근본 원칙이 되는 것을 관찰한다. Davies and Frawley (1991)는 기능적이고 상대적으로 성공적으로 적응한 성인 자기가 어떻게 상처입은 아동을 담아낼 수 있는지 묘사한다. 그런 아동은 여전히 접촉되고 인정되고 자신이 겪은 비참함에 대해 보상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마음의 우울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 해리되고 망각된 정신 상태와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우울적 정신 상태는 자기 상태(self-state)의 해리된 부분에서 담겨져 있는 외상적인 기억이 의식에서 재현될 때 그리고 우울을 방어할 때 드러나게 된다. 우울은 낮은 자존감을 동반하는 정서(affect)로 이해되어왔다. 외상화된(traumatized) 조건에서 낮은 자존감은 자기 비난과 자기 고발을 만든다. 희생이 죄책감과 가치없음으로 셀프에 대한 관점을 유지할 때 이것은 거기(out there)의 horror의 왜곡에 대해 허용하고 회복과 보상이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희미한 소망을 유지하게 된다. 더군다나 해리된 셀프의 부분은 이미 유아기 우울에 담겨져 있다. 유아기 우울은 트라우마틱한 경험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게 될 것이다. 해리된 정서적 상황은 성인 우울의 근거가 된다는 가설을 가지고 우리는 우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치료전략의 기회를 얻는다. 그 자체로 비난의 기능을 하는 인지적 임상 대신에 치료 과제는 중단되었거나 한번도 시작한 적이 없는 애도를 하기 위하여 침몰하는 배처럼 의식으로 다시 끌어올려지기 위해 시도할 수 있으며 정서와 표상이 하나로 전체(완전한) 경험의 상태는 억압되어진 것이 아니라 해리된 것이다.
나는 여성환자와 함께 한 작업을 통하여 많은 신랄한 경험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여성은 유아기를 통하여 가족으로부터 받은 학대에 고통스러워했고 성인의 삶에서 많은 상실을 초래했다. 트라우마틱한 경험을 고통스럽게 재생하는 것을 통하여 해리된 유아기 자기 상태를 연결하는 치료작업을 고려하는 것은 이미 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종종 우울 무드로 돌아가는 경험을 지속한다. 환자의 인용들은 그녀의 경험을 정립한 그녀 자신이었다. 이후 그녀는 세션에서 고통스럽고 끔찍한 상태를 보여주었다. 트라우마의 정서적 경험은 환자가 “어린 부분(young part)”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존되어왔다. 셀프의 부분은 보듬어지고 사랑받는 소망을 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어린 부분 역시 원초적으로 갈망하는 대상에 대한 그녀의 주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금 현재의 삶에서 구출되지 않은 것에 격분을 느꼈고 안전하게 수용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녀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해리된 상태로의 움직임, 탈인격화(depersonalization), 우울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아이처럼 느낀다. 그녀의 뻗은 팔과 함께, 그것은 나를 마구 비난한다. 그러면 나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스스로 입증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과의 접촉이 끊어진다. 나는 마치 내가 또 다른 행성으로 보터 온 누군가처럼 느낀다; 이것은 나를 미쳤다고 느끼게 했다.....이것은 마치 아동 우울처럼 느꼈다; 나는 사실 아이처럼 되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나를 도울 수 없다.” 이것은 해리되고 탈인격화되고 우울한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황으로부터 나온 일련의 것들이다.
다음의 언급에서 나는 어떻게 그녀의 우울이 자유로움(letting go)과 아동기에 슬퍼하는 것의 필요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는지 보여주고 싶다. 그녀의 아동기는 약속된 것은 전혀 없었다-괴롭힘을 당해 왔던 정서적 고통과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저항.
우울은 어느때 일하던 중간 아주 강하게 일어났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갑자기 마비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경고도 없이; 그녀는 긴장성으로 땅으로 꺼지는 것 같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음 세션에서 그녀는 공포와 버려짐의 정서와 이것을 연관지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리고 철저히 혼자라 느껴지는 정서다. 이것은 그녀가 우울발작 이전의 세션에서 경험한 상황이다. 그녀는 이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때 슬픔과 애도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에게 좀 더 분명 해진 것과 함께 마비되었던 우울의 상황은 이전 시간으로부터 오는 실제 절망이 아니라 고통, 호러 그리고 유년기의 상실을 재경험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방어였다.
그녀는 설명했다: “두려운 것은 이것이 우울안에서 분열되는 것이다; 첫째, 나는 불안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자살하고픈 것을 느꼈다. 사고들은 : 나는 여기에 있을 가치가 없다. 나는 사라지기를 원한다. 처음으로 무능함을 느낀다. 나는 가치없고 실패한 그리고 분노를 느낀다. 이것은 너무 강렬해서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사납고 독선적인 아이를 다루고 있다. 고통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고통은 초기의 고통이었다. 나는 이것이 이 아이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나는 우울한 어떤 것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그것이 이상한가? 마치 내가 다른 장소에 있는 것처럼.”
이 환자의 경우 한때 그녀가 거절받은 경험과 갈망하는 아동기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고통과 동일시했었던 우울한 무드는 감소되었다. 지금 본질적인 것은 그녀가 울고 있는, 불우한, 수치스러운 자기 존재로서 그녀 자신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세션에서 그녀는 며칠동안 우울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서 그녀가 원인이라 인식하는 것은 “우울로부터의 위안이었어요. 내가 우울에 들어갔을 때 이것은 현실을 숨겼어요; 나는 현실에서의 실제 고통을 느끼지 않았어요. 내 삶의 대부분이 우울이었고 이것을 아는 것은 이것이 나를 위해 진짜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항상 나에게 해야하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보기 어렵게 했다.
좀 더 깊은 그녀의 우울의 동기는 더 이상 해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그녀의 가족과 의존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신념으로부터 오는(younger part). “younger part”가 원하는 것으로 경험했다. 정서적 사막에 대한 인식(개념)은 짧은 순간 동안 열렸다; 이것은 패닉과 테러의 원인이었고 그래서 lesser evil로 나타나는 unavailable에 대한 morose시무룩하고 우울한 갈망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불안을 야기했다.
이런 의존적인 갈망들 외에도 회복과의 강력한 관계가 있다. 다른 경우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가해자들을 위해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러내는 희생자의 놀랄만한 환상에 의해희망은 유지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매우 민감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 가족의 정서적인 끔찍함은 연결되어 있었다. 그녀는 만일 마술적인 행동을 통해서 그들 모두를 도울 수 있다면 결국에는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쓰라린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부정이 되었고 “나는 세상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아요. 그것은 너무나 끔직해요- 조건은 달라요; 내 생각이죠, 내가 충분히 원하면 반드시 일어나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마다 그녀는 우울증을 취하는 대신 비탄을 회피했다. “나는 그물에 걸려있고, 어떤 분리된 정체성도 없어요. 그 아이는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악마를 보았고, 12살 아이는 그들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존재를 만들기 위해 애썼어요; 나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것은 너무나 엄청나고 정말이지 힘들어요.” 잠깐의 멈춤 후에: “지금 나는 우울해요-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요; 난 이제 안전해요.”
어린 시절 트라우마의 고통, 애도에 대한 저항과 우울의 역동은 양가적으로 사랑받은 상실한 대상을 내면화한 결과로 자기 혐오가 되는 전통적 우울의 모델에 의해서는 부적절하다. 테러와 멸절의 불안들이 수반되어 내사된 것들의 더 초기적인 경험들에 기초한 주요 관계는 치료실 안에서 “실재”로서 경험되거나 틀림없이 치료사에게 투사될 것이다. 이것은 환자의 말에서 반영된다: “나는 사무실에 잠깐 들렀어요.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왔을 때, 잘라 버리고 죽고 싶어요. 나에게 스스로를 어떻게 돌보냐고 물어봤나요? 나는 더 우울해졌어요.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돌보는지 말할 수 없고 원하지도 않아요. 누군가가 나를 보호해주기를 바라지, 그게 나이기를 원하지는 않아요. 증인이 있고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없어요. 나에게 이렇게 했던 엄마에게 무지 화가 나요, 이런 말들조차 할 수가 없어요: 나는 누구죠?”
학대받은 사람들의 애도 과정에서의 중요한 단계는 박해자에게 맞설 수 없었던 상황에서 느낀 수치심을 극복하는데 있다. 수치심의 근본은, 어찌됐든 학대는 무가치함과 본질적인 unlovability 때문에 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깊은 신념이다. 수치심 너머에는 자발적인 자기-소멸과 희생자로 만든 것에 순종하고 수년 동안을 두려움과 숨김속에서 수치심으로 죽은 채로 시간을 보내왔다.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환자들은 split-off로, 분류된 방법으로 자주 유지됐었던 좀 더 이상화된 자기의 시각을 허용해야만 한다.
환자는 소녀들과 여성들은 열등하다는 가족들의 강력한 선입견에 대해 엄청난 수치심을 감추고 있었는데 한 세션에서 치료 과정의 변환점이 생겼다. 몇 회기 후, 그녀에게 강력한 편집적 두려움이 증가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조롱하거나 경멸하고 공격할까봐 두려워서 정말로 나를 믿을 수 없었고 이런 특징적인 취약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위급 상황에서 전화해서 나에게 말했고 이것이 얼마나 모욕적인 시각인지를 깨달았다. 이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그랬던, 경멸과 꺼리던 것이 싫어서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유지해왔던 자신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충격이었다. 여성의 취약함과 자신 스스로가 선입견적인 관점을 수용하는 것을 비난하는 그녀 자신의 두려움은 나 역시도 온실에 앉아 있다는 내 말에 완화되었고 그것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말할 수 있는 어른의 책임이었다.
결과적으로 환자는 통합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은 진실한 내 모습이에요;그 느낌이 몇 시간동안 지속되요. 그건 상대적으로 나에게 특별한 거에요. 이해해요? 전반적인 삶에서 나는 불안에 시달렸었어요. 몇 시간동안 그것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다른 것들에 주의를 뺏겼고 내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애도 과정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 자신의 홀로 있음에 대한 자각은 증가했고, 슬픔은 우울 상태의 전환으로 교차되었다. 그녀는 해리의 사용을 줄어들었고 어린 아이로 경험했던 상황에서는 충분한 정도로 고통받았다. 그녀는 세션에서 충분히 울었고 “나는 더 이상 구출되기를 기대하지 않아요. 내 호소를 그만둘거에요. 현실감이 생겼지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아요. 난 단지 끔찍해요. 지금 당장 밝혀지는 것이 당혹스러워요.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요. 난 거의 마비되었고, 정말이지 엄청나요. 내 심장이 깨진 것만 같아요.”
 
Conclusion
환자와의 분석 작업은 그녀가 사실은 얼마나 우울한지 그녀의 인식을 돕는 것에서부터 해리된 아이의 자기 상태의 "young part"의 재발견까지를 포함한다. 이 과정은 환자에게 우울 그 자체는 주요한 문제가 아니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환자에 의해 이해되는 만큼, 그녀가 child-self에 연결할 수 있고, 우울은 그녀 자신의 놀라움으로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테러, 고통, 슬픔과 함께 심연에 직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애도의 과제는 depressed mode로 종종 그녀를 돌아가게 할 수 있다. 해리된 child-self는 깨달은 사람이 슬퍼하는 어린 아이를 도와야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Shane and Shane (1990) 은 만약 적절한 자기대상이 유용하다면, 애도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분석적 작업에서 무중력 존재(압력이 없는)에서부터 더 적극적인 교전을 위한 준비상태까지의 범위에 이르는 탄력적인 태도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분석가는 강건한 목격과 차분하게 지지적인 존재가 될 준비를 해야한다. 그리고 겁먹은 어린 아이가 되어 필요할 때에 더 적극적으로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어야한다. 이것은 환자의 삶 안에 악랄하고 잔인한 경험으로 반복된 부닥침에 대해서 역전이적 회피 반응을 극복하는 것을 포함한다.
나는 케이스 사례를 설명하려 한다. 고통스러운 진실이 드러날 때 잔인하게 행동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서적인 사막 안에서 성장한다. 우울 무드 상태는 만성화되고; 의기소침한 갈망과 자책은 심연을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노력의 일부이다. 우울병인적 이동은 고통스런 현실의 어떤 지식을 갖는 지점에서부터 자기 축소(self-diminution)와 자기 저하(self-debasement)의 포지션, 구조와 복구의 환상까지이다. 우울은 방법상 덜 악랄해지는 차악의 선택이다.
다시 한번 환자를 인용하자면, “나는 부인해요. 나는 그 세계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지난 세션 동안에 나는 알았지만 나의 일부는 그것을 부인하고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지점에서 나는 나쁘고 그들이 나를 구조하러 올 거에요.”
이런 완강한 부인을 위해 한층 더 나아간 고려들은 소망이다. 구조되려는 것뿐만 아니라 회복하기 위해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구조자가 되려는 것이다. 따라서 외상화(Traumatization)는 상처받은 것을 회복할 수 있다는 보상적인 환상의 형태로 전능감의 원인일 수 있다.
트라우마와 함께 우울의 연구는 자기애적 상처를 개념의 더 넓은 관점으로 이끈다. 불안정한 정신적 평형(psychic equilibrium)이 반갑지 않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장애가 될 때, 그것은 항상 허약함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간주된다.
자기애적인 상처는 외상적 현실을 만난 결과이다. 그러나 더 자기애적인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조직화와 종합하는 능력이 부정과 해리, 고립에 기인한 정서적인 내적 삶으로 손상된 접근과 모든 가치와 신념 시스템의 파괴에 의해 마비될 때이다.
우울은 실제적 상처받음의 경험이 이차적인 이득으로 사용될 때 결과이다.-희생자 신분이 가해자에 의해 구조되기 위해 들어올 때 구별하거나 분리하기 위해서가 아닐 때. 결함이 있음으로서 실제적인 한과 자기감은 희생자의 마음안에서 엉키고 혼란스럽게 된다.
트라우마를 취소하려는 시도에서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않은 자신을 보는 것은 고통스런 현실적 관점을 발달시키고 구원의 희망과 원가족 회복을 포기하는 과제를 두고 경쟁할 것이다. 이런 환자의 경험속에서, 그녀는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는 불쌍한 희생자의 입장에서 떠났다. 무엇을 놓쳤는가, 무력한 어린이와 관련된 연민어린 사람이다.
임상적 이론적인 숙고를 경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녀 자신을 향한 동정의 능력을 발달시키려는 심각하게 traumatized 환자를 위한 것이다.
반갑지 않고 고통스런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 언제나 우울증의 정신적 과제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심각한 traumatization로 이루어질 때 더 많이 힘들다. 환자가 그녀의 어린 시절의 세계가 비참한 비안간성의 하나였고 원가족의 잔인함에 의한 형태라는 그 사실을 직면해야한다. 그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 자신과 자신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발달시키기위한 변화이다. 즉 그녀의 성인 자기와 가져 보지 못한 "young part" 사이의, 그녀가 자주 뚜렷하게 인식하는 그녀 자신안의 다른 사람이다.
희생자의 측면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녀가 그녀 자신과의 관계, 특히 그녀의 해리된 어린 자기와의 관계, 경멸대신에 동정에 기반한 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다.


참자기 정신분석 심리치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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