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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riching the Experience of Teaching through Understanding and Using Countertransference Feelings.

참자기 2013-11-20 (수) 00:42 10년전  
 
Enriching the Experience of Teaching through Understanding and Using Countertransference Feelings.
 
Toby Chuah, M.S.W., Ph.D. and Susan Jakubowicz, M.S.W., Ph.D. /  번역: 신원일
 
역전이 감정의 사용과 이해를 통한 교수 (Teaching) 경험의 강화
 
 
저자들은 역전이에 대한 현대 정신분석 그룹적 이해를 가지지 않거나 그룹으로서의 학급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 신참 교사의 초기 경험이 가진 한계를 이야기한다. 그들은 교육과 현대 정신분석 영역들의 발달이, 현대 정신분석 그룹 리더로서 교사-교육가를 위한 역전이 경험의 개발을 얼마나 촉진시켰는지, 그리고 그들의 교수 경험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들었는지 기술한다. 본 논문에서는 역전이 주제와 관련된 교육 문헌 및 현대정신분석 문헌에 대한 평가가 요약되고 일화들이 제시된다.
 
지난 4반세기 동안에 걸친 교육가로서의 경험을 되짚어볼 때, 우리는 교수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크게 변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 자유롭게 사고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볼모지에서 출발한다고 느꼈지만, 이제 우리는 현대적 정신분석과 현대적 정신분석 그룹 과정을 통해, 환자 그룹과의 공동 작업뿐만 아니라 학생들 및 학급들과의 조우에 깊이와 새로운 차원을 추가했음을 발견한다.
 
지난 25년 동안 현대 정신분석과 현대 정신분석 그룹 과정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들과 접촉하지 않거나 그들에게 두려움을 느꺼거나 또는 그들을 의식하면서도 그들에게 지배될 때, 그러한 감정들이 우리의 성과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룹 멤버들이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감정들을 오해하거나 동떨어져 있음을 느끼거나, 또는 그룹의 감정적 삶의 난관 봉착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사가 학습과 교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에 내재된 감정적 정보를 신경쓰지 않을 때, 일군의 부정적 결과들이 뒤따른다. 교사들은 단기에 학생들에게 효과적일 수 있지만 종종 그들의 지적 사회적 감정적 발달에 해로우면서도 강력한 학급 관리 수단들에 재빨리 의존할 수 있다. 그들은 학생들의 고통과 단절됨으로써 지나칠 정도로 관여하거나, 학생들과 부모들, 동료들의 감정을 거부할 수 있다. 또는 학생들을 과도하게 동일시할 수 있다. 공교육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의 높은 중퇴율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교수-학습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감정들을 상기하기보다 내버려둔다고 믿는다.
 
교과내용의 복잡성 뿐만 아니라, 학습 상황 자체에서 발생하는 감정들과, (그룹으로서의) 학급 및 각 학생들이 교사에 미치는 감정적 영향으로 인해, 교수는 복잡한 과제가 된다. 전능함과 전지함의 감정들은 재빠르게 무용성과 기만성, 어리석음으로 바뀐다. 무지의 감정들은 이론적 지식의 그럴듯한 현시에 의해 감추어지고, 무능함의 감정들은 힘의 행사에 의해 감추어지며, 혼란의 감정들은 엄격한 통제에 의해 감추어지고, 부족과 굴육에 대한 두려움은 우월성에 대한 주장에 의해 감추어짐으로써, 학생들을 왜소하게 만든다.
 
교수의 경험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주도 그룹들의 경험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행동 관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는 것과, 감정들을 해석하는 것, 그리고 타인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감정적 영향을 사고하는 것은, 학급의 본질과 그룹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룹 리더로서의 교사들에게 축적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느끼거나 느낄 수 없는 감정들, 즉 무력감이나 혼란, 당황, 죄의식, 절망, 우울 등의 감정들이다. 교사로서의 우리가 이처럼 예상치 못하면서도 심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들의 수령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학생들과의 접촉을 풍요롭게 만들뿐만 아니라, 더 깊은 레벨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분석가이자 그룹 리더이자 교사로서 우리가 수행하는 작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우리의 감정들을 의식하고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정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통제하려고 시도하기보다, 그들의 기원을 이해하고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토비 (Toby): 첫 번째 일화 시작
 
내가 25년 전 뉴욕시 공립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직 정신분석에 입문하지 않았고, "역전이 (countertransference)"란 단어를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내 감정적 발달의 암흑기였다. 나는 내 자신의 감정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으며, 타인들의 감정을 통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들의 감정에 거의 무관심했다.
 
내 첫 번째 학기의 생물학 수업은 14-17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내 자신이 끔찍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많은 혼란스러운 감정들 가졌으며, 내가 그러한 감정들을 가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 당시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 감정들은 무력감에서 적대감까지 이르렀고, 성적 충동은 걷잡을 수 없었으며 살인 감정들은 강력했다. 하지만 기쁨과 온정, 성취의 순간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순간들은 학생들과 나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접착제였다. 나는 내가 독재자이자 사형집행인이 되길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리고 그러한 상상이 불편해졌을 때, 교사를 그만두고 그동안 꿈꾸던 레스토랑을 개업하여 학생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어했다. 이러한 두 감정은 교사로서의 내 경험에서 보기 드물었다.
 
내 직업적 삶을 변화시키는 첫 해에 세 가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첫째는 학교에서 동료의 발견이었다. 막 현대 정신분석 트레이닝을 시작했던 돌체 샤츠만 (Rochelle Shatzman) 박사는 윌리엄 키르만 (William Kirman) 박사와 함께 롱 아일앤드 대학 (Long Island University)에서 생활지도 및 상담에 대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나의 교수 감독관으로서 그녀는 내가 경험하고 있던 감정적 충격을 이해하였으며, 내가 학생들의 감독에서 내 감정들을 관철시키도록 격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가 현대정신분석과 현대정신분석 트레이닝을 받도록 격려하였다.
 
그녀는 수업에 지각한 학생들에 대한 감독에서 내가 마구 소리치는 것을 중단시킨 후에, 내가 학생들이 정시에 도착하는 것을 도우려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도착하지 않게 하려는 것인지 날카롭게 물었다. 그 당시 나의 초자아와 이드는 분열되어 있으면서 아직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래요"였다. 그녀는 학생들이 학급에 도착했을 때, "만나서 반갑구나. 폴 옆 좌석이 비었구나. 이제 페이지를 펴자" 같은 차분한 환영보다, 나의 짜증을 전달하고 현 있음을 인식하도록, 나에게 나의 현 위치를 상기시켰다.
 
두 번째 사건은 아서 저어실드 (Arthur Jersild, 1955)의 책을 발견한 일이었다. 저어실드는 교사들이 자신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학생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감정들에 대한 의식의 부족과 오해는 다양한 파괴적 방식들로 발현됨으로써 교사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과 학생들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교사들이 마주하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들은, 불안과 분노, 경멸, 학대, 낙담, 포기, 불신, 경쟁, 시기, 두려움, 증오, 질투, 고립감, 무력감, 무용감, 격노, 앙심, 그리고 성적 거부감 등이었다. 본 장 "적대감 (Hostility)"에서 나는 어리석은 분노이든 정당화될 수 없는 분노이든 악의적인 분노이든, 분노한 사람으로서의 내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저어실드는 조사되지 않은 감정들이 교육 환경에 미칠 수 있는 많은 파괴적 방식들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학습 속도가 느린 사람들을 속물적으로 평가하거나, 학생들이 풀지 못할 시험과 과제를 부여하거나, 동료들과의 경쟁을 부추기거나, 우리가 직면하길 원하지 않는 감정들을 자극하는 주제들을 논의하고 작문하는 것을 피하거나, 언어적으로 학대하거나,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 등이 그렇다. 하지만 저어실드는 교사의 교수 경험을 풍부화시키고 성숙한 개입을 창출하며, 교사와 학생 간의 협력과 학습에 대한 저항을 해결하기 위해, 일단 이해된 교사들의 감정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열정"에 대한 저어실드의 장에서, 나는 '역전이'라는 사고를 소개 받았다. 나는 내가 다음을 읽었을 때 느꼈던 위안을 기억한다.
 
우리는 자주 열정을 부드러운 무엇, 아마도 감상성 (sentimentality)과 가까운 것으로 사고한다. 열정은 때때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지만, 더 심오한 심리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열정에는 부드러우면서 유연한 무언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강인하면서도 매우 단단한 무언가도 존재한다. 열정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모든 감정들 - 사랑이나 증오, 기쁨, 두려움, 슬픔 의 영향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정들을 인내하고 매우 오래 동안 간직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감정들에 감동한 사람과 동료애를 나누거나 그 의미를 받아들이기 위해 감정들을 충분히 흡수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완전한 발달에서 열정의 영웅적 특징이다. 분노의 황폐함과 공포의 엄청난 영향, 그리고 사랑의 가장 부드러운 자극과 마주하고, 이러한 것들을 더 커다란 맥락에서 포용하며, 이러한 감정들을 수용하고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의미를 이해시키는 것이야말로, 감정적 동료애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열정적인 사람은 사랑을 하지만, 증오도 한다. 열정의 범위는 인간 감정의 전 범위에 걸쳐 있다 (pp. 125-126).
 
나는 공포스러운 교사에서 열정적인 교사로 이행하는 것을 천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나쁜 감정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적 행동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으며, 나쁜 교사야말로 그 자신의 양가감정뿐만 아니라 그를 향한 학생들의 양가감정을 인내하지 못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 번째 사건은 교실에서 "유령들"의 인식이었다. 각 교실은 유령들로 가득 차 있다. 각 학생은 분대를 데려오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령을 데려온다. 유령은 교실로 들어와서 만남을 가지기 전 학생과 교사 각자에게 감정적으로 유의미한 사람의 그림자이다. 각 유령은 우리가 교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실망한 아버지와 격노한 어머니가 나를 매일 학교에 데리고 왔음을 즉시 깨달았으며, 이것은 내가 내 학생들의 행동에 부여한 거리두기 반응들 (distancing responses)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수잔 (Susan): 두 번째 일화
 
내 첫 번째 교수 경험은 30여년 전 인테그랄 요가 연구소 (Integral Yoga Institute)에서 요가 강사로 근무한 것이다. 완벽해지고 모든 것을 아는 것에 대한 나의 요구는 나에 대한 내 학생들의 요구가 완벽해지고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가 나의 사적인 요구를 위해 요가를 연습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결코 없었다. 그것은 고립된 경험이었으며, 나는 다른 누군가의 "에너지 장 (energy field)"에 노출되지 않았다. 요가 교사 트레이닝을 마친 후, 나는 내 첫 번째 요가 수업을 가르치길 고대했으며, 나 혼자 연습했던 경험과 같은 평온함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놀랍게도 내가 경험했던 교실을 꽉 채운 감정들은 결코, 전에 가졌던 평화롭고 긍정적인 감정들이 아니었다. 학생들로부터 나오는 감정들이 있는가 하면, 내 자신으로부터 기원하는 감정들도 있었다. 나는 이러한 감정들이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인 역전이 반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모든 사람은 멋지다라는 철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가지면서 모든 사람에 대해 항상 멋진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꼈다. 나의 첫 번째 수업은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주었다.
 
당신은 내가 고요한 교실을 거닐면서 모든 사람들의 숨죽임을 느끼고 그들을 점검할 때, 또는 내가 교실의 정적을 깨는 커다란 균열음이나 컵 소리를 야단칠 때, 무엇을 느끼는지, 오직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와중에 강렬한 죄의식과 수치심, 자기 비하를 경험했다. 수업 후 학생들은 나에게 와서 질문들을 했으며, 자신들이 "치유되길" 기대하면서 나에게 그들의 사적인 문제들을 털어놓았다. 나는 항상 사랑과 증여의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의아해했는데, 확실히 나는 완벽하게 느끼지도,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참에 나는 현대 정신분석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나는 내가 이러한 감정들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교수와 삶이 더 쉬워지고 완전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긍정적인 감정들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공존하고 그러한 현상이 정상적임을 알고서 위안을 얻었으며, 타인들에 대한 감정들과 내 자신에 대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에게 많은 에너지를 주었는데, 자연스러운 것과의 적대적 투쟁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은 나에게 내 자신과 타인들, 그리고 교수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제공했다. 나는 더 완전하면서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내 자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감정적 여행에 착수할 수 있었다.
 
계몽
 
우리는 교육과 정신분석 문헌에 대한 조기 탐구를 통해, 교사의 삶에서 감정의 역할과 교수의 감정적 경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많은 선구자들 예를 들어 A. Freud, D. Burlingham, A. Aichorn, E. Erikson, M. Klein, E. Kris, and E. Clevans - 이 교육가이자 분석가로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무되었다. 프로이트 (1925)는 에이크혼 (Aichorn)의 웨이워드 유스 (Wayward Youth)에 대한 서문에서 "정신분석의 적용만큼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거나 많은 희망을 제시했던 것도 없으며, 결과적으로 교육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정신분석의 사용만큼 유능한 연구자들의 매력을 끌었던 것도 없었다."라고 논평했다. 흥미롭게도, 유럽에서 발간되었던 일련의 시리즈물 "아동에 대한 정신분석 연구"는 아동의 발달과 교육에 대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프로이트 (1935)는 모든 교사들이 개인적 분석을 거쳐야 한다고 믿었는데, 우리는 개인과 그룹으로서의 분석에 착수하였다.
 
우리는 교육과 정신분석의 영역들에서 문헌과 유사한 발달들을 발견하였다. 정신분석가들은 역전이의 치료적 가치를 발견하였고, 교육가들은 교사들에게서 발생하는 감정들 , 학생들 및 학급과의 관계, 그리고 "학교"로 불리는 더 큰 시스템에의 소속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물 - 을 인정하고 사용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로 교육과 정신분석 영역의 저술가들은, 분석 작업에서 정신분석가와 교육가가 느끼는 감정의 중요성을 대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레드엘과 위네만 (Redl and Wineman, 1952)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그들의 감정들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교육가들이 그들 내부와 학생들, 동료들의 감정적 소란을 듣지 못할 때 나타나는 위험을 감지하였다. 저이실드 (1955)는 학생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교사 자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느꼈다. 그는 많은 교육가들의 삶에서 중요한 장애물들이 이해되거나 제거되지 않는다면, 많은 감정들이 내부에서 자유롭게 올라오는 것이 방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신분석 문헌에서 우리는 열정에 대한 저어실드의 글이 Winnicott (1949), Heimann (1950), Little (1951), Racker (1953, 1957), Kernberg (1964)의 주장들과 일맥상통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분석가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많은 현대 정신분석가들은, 자유롭게 느끼는 것의 가치에 또다른 차원을 추가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타인의 무의식과 연결되기 위해 정신분석가의 감정 및 교사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하이만 (Heimann, 1950)은 정신분석가가 환자에 대해 경험하는 모든 감정들을 포괄하기 위해 "역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녀는 "정신분석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감정적 반응은 분석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분석가의 역전이는 환자의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이다."라고 믿었다.
 
우리는 스폿니츠 (Spotnitz, 1952)의 관찰 - "치료사는 여러 개인들과의 집단적 작업에서 본능적 힘에 한꺼번에 노출된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그룹 치료사는 그의 유도된 신경증이 훨씬 더 강렬할 뿐만 아니라 더 철저하고 지속적인 자기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발견한다." - 에서 우리 학생들의 강렬한 감정적 경험이 반복적으로 진화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학급이 슬라브슨 (Slavson, 19550)에 의해 명명된 "전이의 네트워크 (network of transferences)"라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는 감정적 유도를, 학생들과 학급들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위해 수행하는 은밀한 노력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노력은 학생들의 공통된 무의식적 감정들로부터 나오는 메시지들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들에 귀를 기울이거나, 학급의 삶과 각 학생의 삶에서 그러한 감정들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학급의 총 감정이나 성향을 인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느껴던 것이 자주 그들의 초기 대상들이 그들에 대해 느꼈던 감정들임을 배웠다.
 
한편 현대 정신분석의 영역에서 많은 저술가들은 교육의 영역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교실에서의 삶을 해명하기 위해 대인간 역동성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된 논문들은 학습과 협력에 대한 저항을 해결하기 위해, 교사들의 감정들과 그러한 감정들의 사용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취하였다. Friedman (1977), Kirman (1977a), Welber (1977), Sackler (1979), Chusid (1982), Kirman (1982), Meadow (1982, 1988), Zaretsky (1982, 1991), Clevans (1983), McAloon (1991)는 학급을 그룹으로 경험하는 교사들이야말로 교사-학생-학급-주제 간 상관적 관계에 의해 환기되는 강력한 감정들을 분석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키르만 (Kirman, 1982)은 창조적 교수 및 학습에 참여하는 학생과 교사는 교실이라는 그룹 환경에서 만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사들이 그룹 기능의 기본적 원칙들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원칙들을 현 학습 환경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사들이 학생들의 의사소통과 유도된 감정들의 무의식적 의미에 초점을 맟출 것을 촉구하면서,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기 전에 무엇을 말하고 실천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교육 영역의 문헌에 대한 병렬 검색에서, 학습이 감정적인 과정이라는 사실과, 교사들과 학생들의 압도적 감정들이 인식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거나 수용되지 않을 때 교수와 학습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군의 교육가들-분석가들 , Bettelheim (1950), Jones (1968), Ekstein and Motto (1969), Field (1989), Wolf (1989), Cozzarelli and Silin (1989) - 의 저작들이 전면에 드러난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결국 우리는 교실 삶에서의 문제가 그룹 삶에서의 문제와 유사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학생들이 교실로 걸어갈 때, 감정적 변형이 일어난다. 갑작스럽게 그들은 교사들과 동료들에 대한 감정의 미로 속에서 동반되는 요구와 열망, 두려움에 둘러싸인다. 의존과 복종, 가학주의, 완벽주의,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상당한 불확실성에 대한 갈등들이 활성화된다. 이처럼 어려운 정신체계에서 그들은 시간과 공간, 관심, 산소, 재료를 공유해야 하는 교실로 들어간다. 때때로 그들은 무시되거나 묵과되거나 고립되거나 검열되거나 잘못된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두 성의 학생들에게 가까워지도록 노출되거나 압력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이 중요한 성인들과 형제들에 대한 과거의 경험에 따라, 우리와 그들의 동료들부터, 관용이나 엄격함, 지원이나 부담, 신뢰나 기만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에 회의적이며, 그들 감정들의 표현으로 인한 결과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많은 학생들은 그들의 감정과 접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 자신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을 때마저도, 그러한 감정들을 말로 표현할 어휘의 부족을 절감했다. 그들이 가진 감정들의 의미는 무의식적인 동시에 많은 것들이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 메시지들은 우리를 정기적으로 휘몰아치는 유도된 감정들을 통해 전달될 수 밖에 없다.
 
토비: 세 번째 일화
 
유도된 감정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학급에서는 떠들석함이 있었는데, 그러한 소란 속에서 나는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을 가다듬고, 슬픔은 그 날 내가 학급에서 느꼈던 감정들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에게 말을 건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내 학생들에 의해 어떤 감정들이 방해를 받았는가? 두려움이었는가? 아니면 불확실성이었는가? 나는 그들에게, "오늘 여기서 슬픔은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들의 들떠 있는 기분을 지시했는데, 그들은 서로 다른 대학들로 진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할까? 그렇다, 그들은 그들 학급과 고등학교의 안전한 울타리를 떠나면서 느끼는 미지의 두려움에 대해 말했다.
 
또 다른 시간에 나는 내 자신이 한 학생 ()을 질식시키고자 하는 반복적 상상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가 나의 실수를 지속적이면서도 유쾌하게 지적함으로써 나에 대한 경멸을 은밀하게 표현한다고 믿었다. 학교 이벤트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만나서 존에 대한 그의 경시적 태도를 관찰한 후, 나는 존이 그의 아버지의 성급함과 자신에 대한 모욕에 의해 질식감을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그가 조급한 아이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석가들에 대한 오르몽 (Ormont, 1970, 1980)과 스폿니츠 (Spotnita, 1976)의 권고들은 교사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조절하거나 변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유도된 감정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룹과 개인의 무의식적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경로는 막히게 된다. 유도된 감정들을, 구성원들의 공통된 인생 이야기를 재구축하기 위한 지원 수단이자, 그룹 멤버들의 구속된 정서에 대한 핵심으로 바라보는 오트몽의 견해는, 교실에서 학습에 대한 저항 - 인지적 학습이나 감정적 학습, 사회적 학습에 대한 저항을 불문한다 - 에 직면하는 우리 교사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에른스버거 (Ernsberger, 1990)는 객관적 역전이가 "저항을 효과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분석가의 개입에 진정성 (authenticity)"을 제공한다는 점에 동의하였다. 교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룹에서 하는 것처럼 학급에서 약속 (contract)을 발달시킴으로써, 우리는 저항을 확인하기 위한 구조를 창설한다. 교실 약속은 참석과 시간엄수, 글쓰기 과제의 완수, 사고와 감정, 아이디어의 표현, 대화 시간의 공유, 교과내용의 숙달, 그리고 다음 수업으로의 이동을 포함할 것이다. 교사와 그룹 리더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약속에 저항하는 학생들과 그룹 멤버들에게 반응하면서 감정들을 느낄 때, 그리고 우리 감정들이 우리의 독특한 개인적 역사들과 해소되지 않은 갈등들의 결과물임을 발견할 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감정적 레퍼토리를 확장시키고 우리의 교수 경험을 풍부화시킬 수 있는 독특한 기회들이 부여된다 (Morrel, 1992).
키르만 (Kirman, 1977b)은 교사들에게, 현대 분석가들처럼 역전이를 의사소통의 중요한 형태로 여기도록 촉구하였다. 그는 학급의 그룹 저항이 교사에게서 자주 강력한 역전이를 형성시킨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룹 리더가 그룹 치료의 진행을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 역전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교사는 교실에서 전이 상황의 진행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감정들을 사용할 수 있다. 키르만은 주관적 역전이를, 학생 전이와 학급 전이에 의해 발생하는 동시에 교사의 과거 사건들과 상호 작용을 하는, 교사의 감정들이라고 말했다. 객관적 역전이는 교사에 의해 유도된 감정들로서, 학생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교사 이외의 다른 중요한 사람들에게 느꼈던 감정들을 가리킨다. 요약하면, 주관적 역전이가 백내장을 가진 감정적 시야라면, 객관적 역전이는 정상적인 감정적 시야이다.
 
슬라빈 (Slavin, 1996)은 교수의 어려움이 교사들이 감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들을 억압하거나 왜곡하거나 가장하거나, 또는 학생들의 감정들을 왜곡하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교육 영역의 문헌들 , Biber (1961), Moustakas (1966), Iscoe et al. (1967), Ojemann (1967), Aspy and Roebuck (1970), and Lawrence (1971) - 은 교사들이 교실에서 그들의 감정들을 건설적으로 처리하고 이용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토비: 네 번째 일화
 
이 스토리의 제목은 "계모 역전이 (The Stepmother Countertransference)"이다. Ⅰ학기는 다른 교사와 함께 만족스러운 학기를 막 끝낸 학급 전체를 인계받았다. 나는 이전 학기에 학급의 한 학생으로부터, 그 학생과 교사가 새로운 미지의 학부로 이동하기보다 다음 학기에도 함께 머무르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학급이 종결 과정을 거치도록 장려하는 학교 정책으로 인해, 나는 다음 과정인 "전이와 저항"을 가르치도록 요구를 받았다. 수업은 처음 두 번의 회합 후에 시작되었지만, 나는 그 수업에 대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교실에서는 호응이 거의 없었고 일반적인 무관심만이 흘렀다. 나는 감정들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해, 학급을 자극하고 흥분시키기 위한 나의 열망과 바램을 제어하였다. 일부 학생들이 일과 기록지로 그들이 "곤경" "무력감"을 느꼈다고 보고했을 때, 나는 나의 무력감이 공유되고 유도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도대체 말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어쨌든 나는 그러한 침묵에 기여하였는가? 나는 학급이 그들의 지난 교사와 헤어진 것을 슬퍼하면서 여전히 그에게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그들이 나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는 감정을 인내할 수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지금 "최고의 교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나의 분노를 인식했다. 나는 라이벌 의식의 전이를 통제하면서, 교실에서의 무력감을 해결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일소할 감정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 누군가가 무력감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교사에 대한 긍정적 경험의 상실을 슬퍼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음을 인정하였다. 그런 다음 나에 대한 불만들, 즉 복사할 것이 너무 많다거나, 읽고 준비할 것이 너무 많다는 등의 불만들이 제기되었다.
 
나는 그들이 이전 교사와의 멋진 화합적 경험에 기반하여, 여기서 긍정적인 경험을 가지는 방법에 대해 나에게 무엇을 추천할지 궁금하게 여겼다. 학급이 곤경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나는 마르스 Y (그들의 이전 교사)가 그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개입은 그들이 열등한 의붓아버지인 나에 대한 분노와 상실의 감정들을 처리할 때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에는 전체적인 경험이 그룹에서 전이와 저항의 훌륭한 예시로 논의되었으며, 이것은 그들이 읽었던 인지적 자료를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학급에 속한 일군의 학생들은 그러한 과정을 그들이 성장하면서 가졌던 경험 , 부모 중에서 "더 좋아하는 일방"이 사망했을 때, 그 일방을 질투하는 다른 부모 일방의 질투로 인해 그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못했던 경험 - 과 연결시켰다.
 
수잔: 다섯 번째 일화와 여섯 번째 일화
 
역전이 경험에 대한 두 사례들이 지난 학기에 나왔다. 나는 한 사건이 나온 순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후에 곰곰이 생각한 후, 다음 학급에서 기억해냈다. 나머지 사건은 진행 중이던 순간을 기억할 수 있으며, 유도된 감정을 사용하였다. 나는 첫 번째 경험의 진행 순간을 의식할 수 있었고, 유도된 감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경험은 내가 그룹 작업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의 한 학급에서 일어났다. 그 학급에는 27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첫 번째 모임에서 우리는 과목 과제를 점검하고 있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항상 대학의 학업 기준들에 맞추기 위해 서면으로 된 과제들을 요구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중간고사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으며, 내가 중간고사를 없앨 수 있는지 묻기도 하였다. 과거에도 나는 그들의 감정들을 탐색함으로써 그러한 요구에 직면한 적이 있었지만, 이 요건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고, 한 편의 논문만을 작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리고 동일한 과목을 가르치는 다른 교수가 중간고사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이것이 실제로 옵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제공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하고자 했다. 실제로 수업은 다음에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 상태에서 끝났지만, 그 때 결정했어야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날 있었던 일을 생각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자신이 이번 학기에 많은 것을 해야 했기 때문에 27명의 중간고사 논문들을 평가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학급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만약 내가 그들에게 그러한 과제의 짐을 부담시킨다면, 그들이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나는 필요하다고 느꼈던 증오를 받아들이는데 자유로와졌다. 다음 날 학급으로 가서 중간고사가 예정대로 실시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학생들이 이에 따라야 하고, 중간고사 논문을 제출하지 않는 학생들은 필요하다면, 그 학기의 나머지 기간과 내 인생의 나머지 기간 동안 나를 자유롭게 증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비현실적 기대를 가졌으며, 그들의 증오를 받지 않으려는 바램은 나를 곤경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일단 이러한 점이 나에게 명확해지자, 나는 학급을 더 발전시키기 위한 감정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참자기 정신분석 심리치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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