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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및 수필

나르시즘적 사랑과 죽음

참자기 2014-08-29 (금) 22:12 10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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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깊은 심연을 파고들면 섬뜩한 죽음이 또아리를 틀고 큰 입을 벌리고 있다. 현실에서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기계적인 일상은 무미건조한 지루함을 만들어 사람을 심연의 죽음으로 몰아낸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연으로 떠 밀려가면서 어쩔 수 없는 죽음의 늪을 마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죽음의 늪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거나 이미 서서히 빠져들어가고 있는 사람의 삶에서는 기쁨과 평화로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울, 무기력, 침울함, 의욕 없고 생기 없음, 의미 없음, 중독과 강박, 조울 등은 죽음과 가까운 사람들의 정신적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떻게 이러한 죽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스의 신화에서 물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소스는 죽음의 늪에서 벌어지는 자기사랑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가 외부 대상을 사랑할 수 없는 취약한 자아를 가진 유아의 경험을 일차적 나르시즘이라고 했지만, 성인이라도 세상을 살면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삶의 고통을 소화하기 어려울 때 정신세계는 유아기에 경험했던 일차적 나르시즘으로 서서히 철수하게 된다. 삶의 고통은 현실세계가 너무 두려워 박해불안에 시달리던지, 자아감이 약해서던지,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 되었던지, 트라우마적인 상처나 상실과 슬픔 혹은 이미 고정되어 버린 성격의 구조 등 나르시소스의 저주로써 무작위로 모든 것을 죽음으로 삼켜버린다.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만일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나르시즘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감춰진 깊은 심연의 죽음의 수렁에 빠지거나 가장자리에서 머무를 것이다. 만약 누군가를 자신과 다른 인격을 가진 실체로써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수렁에서 자신을 사랑하다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에 비한다면  가벼운 것일게다. "사랑은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무모함" 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늪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한다. 그렇다! 결국 삶에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은 지나친 나르시즘적 자기사랑으로 인해 목이 조여오는 공포로 서서히 죽어 가는 것보다 낫다.
 
현실에서 행복한 삶이란, 사랑의 고통과 상처 그리고 죽음과의 투쟁을 통해 얻는 진실의 열매다.


참자기 정신분석 심리치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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