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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적 수단으로서 역전이의 개념(초기역사)

참자기 2015-03-04 (수) 15:44 9년전  
치료적 수단으로서 역전이 (Countertransference)의 개념: 그 초기 역사
 
개요
 
현 정신분석 문헌에서 임상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거의 모든 논문들은 적어도 패싱 (passing)에서 역전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역전이가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유용한 치료적 도구라는 점은 현재 널리 인정되고 있다. 거의 모든 학파의 정신분석가들에 의해 저술된 역전이에 대한 논문들은, 그러한 견해의 저명한 주창자들 예를 들어 위니코트 (Winnicott)와 스폿니츠 (Spotnitz), 랙커 (Racker), 스칼레스 (Scarles) - 을 흔히 언급한다. 스폿니치의 작업과 더불어 시작된 현대 학파는 객관적 역전이 (objective countertransference)의 사고를 작업의 주요 기반들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객관적인 역전이 반응을 환자에 대한 이해 방식이자 저항을 해결하기 위한 개입의 원천으로 활용하기 위해, 치료법 이론으로 계속 연구 개발하고 있다.
 
물론 상황이 항상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1910년부터 프로이트가 ' Gugeniibertragung'란 단어를 만들어내면서 치료사에게 "이것을 자신에게서 인식하여 극복해야 한다"라고 충고했던 1910년부터 약 1960년대 말까지, 정신분석 사고는 역전이가 단지 치료에 방해가 된다는 초기 믿음으로부터 오늘날의 지배적인 견해로까지 진화하였다. 1969년 이후로 이루어졌던 가치 있는 작업들로 인해 (이 기간 동안 상당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고를 고려하기 위한 적극적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적어도 기본적 전제를 위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본 논문의 목적은 객관적 역전이를 치료 수단으로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했던 초기 분석가들의 작업을 탐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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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초기 학생들과 동료들 중에서 산도 페렌찌 (Sandor Ferenczi)는 역전이를 분석가의 억압된 무의식적 갈등의 발현 - 즉 정신분석 작업에 대한 방해물 과는 다른 것으로 바라 본 첫 번째 사람이다. 페렌찌 (1919)는 정신 분석 상황에서 분석가의 행동에 대한 프로이트의 두 명령에 내재된 불가피한 모순을 다루었다. 첫 번째는 환자들의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 무의식을 사용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에게 분석적 상황을 부여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다. 페렌찌의 지적에 따르면, 정서의 통제에 의한 역전이의 정복으로 인해 환자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무의식적 과정이 제어되지 못할 수 있다. 페렌찌는 이것을 다음처럼 표현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정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열정뿐만 아니라 정서에 의해 영향을 받음으로써, 분석 데이터의 적절한 수용과 취급에 대한 비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다. 그렇지만 의사 역시 한 인간이고 기분과 충동에 좌우되며 공감과 반감을 가지기 때문에 (그러한 감수성이 없다면, 그는 환자의 정신적 갈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분석 동안 지속적으로 이중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편에서 그는 환자를 관찰해야 하고 환자가 관련시킨 것을 조사해야 하며, 환자의 정보와 행동으로부터 환자의 무의식을 구성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그는 환자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제어하고 필요할 경우 교정해야 한다. (pp. 186-187)
 
이 문제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를 통해, 페렌찌는 분석 동안 지속적인 자기 분석과 개인적 분석을 통해, 분석가는 너무나 극단적인 이 두 감정을 분리시켜야 하며, 치료에 도움이 되는 감정들을 포기하지 않은 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른 논문들 특히 "적극적 기법" (Active Technique, 1920, 1925) "정신분석 기법의 탄력성" (The Elasticity of Psycho-Analytic Technique, 1928) – 에서 페렌찌는 대부분의 환자들 (비록 모든 환자들은 아니더라도)이 분석가를 너그러운 어머니나 엄격한 아버지로 전이시키기 때문에, 환자를 향한 분석가의 행동은 역전이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시기와 다양한 목적에 따라 원래 대상과 같아지거나 정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견해는 알렉산더 (Alexander, 1950)"교정적인 감정 경험 (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과 이후 현대 정신분석의 견해를 위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페렌찌의 독해에서 받는 인상은, 그가 분석가에게서 발생하는 감정과 태도 - 즉 환자에 의해 유도되며 분석가 자신의 과거사와 연결되지 않은 감정과 태도 - 를 알아챘다는 점이다. 실제로 분석가는 환자가 전이시킨 감정들을 가지도록 자극을 받는다. 이러한 가정은 페렌찌가 이러한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역전이를 분석가에게 매우 유용한 치료 수단으로 보았다고 주장한 이제트 드 포리스트 (Izette de Forest, 1942)에 의해 입증되었다.
 
또한 페렌찌의 저작들과 이후 마이클 발린트 (Michael Balint)의 회고적 논평으로부터 명백해진 사실은, 페렌찌가 자신에 의해 기술된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정신분석 실험에서 역전이에 대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렌찌는 그러한 인식을 통해, 부정적 역전이가 분석가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보다 환자들 및 그들의 전이와 더 많은 관련을 가진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페렌찌는 환자에게 분석가의 감정을 말하는 것을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분석가의 실수를 정신분석 기법의 일부분으로 삼은 첫 번째 분석가였다.
 
역전이를 논의하는 초기 문헌들 중에서 헬레네 도이치 (Helene Deutsch, 1926)는 역전이가 두 요소 하나는 분석가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는 환자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 로 구성된 현상이라는 사고의 맹아를 제공하였다. 정신분석에서 "오컬트 과정 (occult processes)"을 논의하면서, 도이치는 역전이가 분석가에 대한 환자의 전이보다 더 많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분석가의 과제를, 환자의 연상들을 받아 그들을 분석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통해 선별하며, 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환자의 연상들이 가진 감정적 내용이 분석가의 내적 경험이 되고, 이러한 지적 처리 과정에서 분석가는 환자의 내적 요소를 인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직관과 직관적 감정이입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석가의 정신구조가 화자의 정신구조와 동일한 발달 과정에 의해 형성된다고 지적하는 그녀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더 나아가 도이치는 역전이 과정의 두 다른 요소들을 제안한다. 먼저 분석가는 환자의 (유아기) 자아와 정서적으로 동일시된다. 둘째, 환자가 분석가에게 초기 대상들에 대한 태도와 감정을 전이시킬 때, 분석가는 이러한 대상들과 동일시된다. 그녀는 이것을 "보완적 (complimentary)" 태도로 부른다:
 
그렇지만 역전이는 유아기 방식으로 집중되어 있는 환자의 자아와 동일시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으며, 내가 "보완적 태도"란 용어로 지시하고 싶은 다른 무의식적 태도들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가 자신의 채워지지 않은 유아기 리비도적 욕망을 분석가에게로 돌리기 때문에 분석가가 이러한 욕망의 오리지널 대상들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분석가가 환자의 전이 환상과 양립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러한 이미지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적 태도 속에서 그의 실제 인성을 포기해야 함을 암시한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보완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러한 동일시의 결합만이 "무의식적 전이"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러한 전이의 목표 지향적 정복과 활용이야말로 분석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의식적 전이는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전체적인 정서적 의식적 관계와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데버러 번역, 1952, pp. 137-138).
 
1926년에 표명된 사고와 이후 현대 정신분석의 개념인 객관적인 자기애적 역전이 (Spotnitz, 1969)의 유사성은 놀라울 뿐이다. 분석가의 성심리적 발달 단계들과 관련하여 역전이를 검토한 에드워드 글로버 (Edward Glover, 1927), 역전이 개념의 전체적 진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역저항 (counterresistance)이 역전이와 정확히 동일한 현상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확실히 글로버는 역전이와 역저항을, 비록 분석가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으로부터 나오지만 환자의 전이에 대한 반응과 의사소통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정으로서의 역전이와 행동으로서의 역저항 간에 중요한 구별을 하였다. 그는 분석가가 역저항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식들을 명시하였으며,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전이와 역전이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그는 "환자가 대상이라면, 더 엄밀히 말해 환자가 분석가 자신의 가학적 충동의 대상들과 동일시된다면, 이러한 반응은 분석가가 자신과 환자를 동일시하면서 가학적 공격성에 간접적으로 저항할 때 나타나는 반응과 다르다."라고 말했다. (p. 511, 강조는 원문의 것임).
 
또한 글로버는 부정적 역전이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이것이 환자의 부정적 전이의 직접적 결과이며, 종종 긍정적 전이로 가장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패니 한-켄드 (Fanny Hann-Kende, 1933)는 분석가들이 자신들의 분석을 통해 그들의 리비도와 파괴적 성향을 승화시킬 수 있다면, 역전이는 환자의 전이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역전이는 분석적 작업을 억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촉진시킬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켄드는 분석가의 역전이가 환자의 전이와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에 대해 명확히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환자의 전이에 대응하는 분석가의 무의식적 기억 흔적을 의식화시키는 요소가 존재함을 암시하였다.
 
"분석가의 심리학적 보상"을 저술한 바바라 로우 (Barbara Low, 1935)는 분석가가 "그 자신의 무의식적 성향을 만족스럽게 다루면서 항상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며, 분석을 통해 그 자신의 정신을 정복할 수 있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오직 분석가 자신의 감정적 활동을 통해서만 환자의 정보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번역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스트라치 (Strachcy)"변이적 해석 (mutative interpretation)"을 분석가가 가진 통찰력의 산물로 기술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분석의 통찰력은 "그 자신의 감정과 직접적이면서 자유로운 접촉으로부터 나온다. 내가 제안한 것처럼, 이것은 분석가에게 비전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분석가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만약 분석가가 분석 과정에서 감정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면" 분석가 자신의 건강에 해로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전이에 대한 카렌 호른시 (Karen Horncy, 1939)의 입장은 다수의 전통적 정신분석 개념들에 대한 포기를 특징으로 한다. 그렇지만 분석가와 환자 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관심으로 인해, 그녀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이론에 부합하는 관찰을 수행하였다. 그녀는 분석가를 "거울 이미지"로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모델을 너무 엄격하게 고수할 경우 환자들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부정될 수 있다고, 분석가들에게 조언하였다.
 
그녀는 분석가가 환자의 태도와 행동에 대한 감정을 불가피하게 가지기 마련이며, 분석가는 "그가 느끼는 반응이 정확히 환자가 원하는 반응인지 의문을 던지고 분석 과정의 진행에 대한 단서를 얻음으로써" 이러한 반응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는 유도된 역전이가 환자와 분석가의 반복적 관계 (, 유아기의 반복적 패턴들)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하는 이론들과 유사하다.
 
스테르바 (Sterba, 1941)"분석가의 객관적 태도가 너무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며, 그로 인한 분석 결과는 제어되지 않은 역전이에서 분석가의 역할 수행보다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감정을 억제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는 태도야말로 분석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역저항이며, 이러한 태도를 너무 엄격하게 고집할 경우 점검되지 않거나 분석되지 않은 역전이로서의 치료에 해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도 페렌찌의 치료적 기법" (1942)에서 이제트 드 포리스트 (Izette de Forest), 페렌찌의 이론에 대한 그녀의 이해와, 치료에서 그 이론의 사용을 개괄하였다. 그녀는 역전이를 치료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옹호하면서, "두 당사자 간의 감정적 관계가 불가피하게 전개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녀는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감정과 분석가에 대한 환자의 감정 간 질적 차이는 분석가가 그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이해하고 있다는 예방적 사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펠드만 (Feldman)의 보고에 따르면, 1940년대 객관적 역전이를 통해 작업한 스폿니츠는 1949년 미국정신의학협회에 대한 연설에서, 그가 많은 상황에서 감정적 유도의 파급력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분석적 치료가 성공하기 위해 치료는 환자에게 감정적으로 믿을만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치료사는 환자에 의해 유도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환자를 돕기 위해 이러한 감정을 활용해야 한다." (Spotnitz, 1949). 물론 이 주제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스폿니치 작업을 관통하고 있다.
 
스폿니치의 작업이나 영국 학파의 작업을 알지 못한 채 아르헨티나에서 작업하고 있던 랙커 (Racker) 1948년 그에게 현 명성을 안겨준 역전이에 대한 매우 정교한 이해에 도달했다. 그 해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논문이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협회에서 발표되었으며, 5년 후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Racker,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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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위니코트 (David W. Winnicott) 1947년 그의 유명한 논문 "역전이에서 증오"를 영국정신분석협회에서 발표하였다. 이 논문 (Winnicott, 1949)"진정으로 객관적인 역전이"란 문구를 사용하였으며, 분석가의 주요 과제가 환자를 객관적으로 증오하고 유아는 "증오하는 것을 증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문은 역전이의 주제가 논의되던 당시까지의 용어들을 크게 변경시켰다. 역전이에 대한 사고가 처음부터 널리 수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대를 표명하던 사람들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일반적인 추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고가 1950년대와 1960년대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역전이는 정신분석 문헌에서 두드러진 주제가 되었다.
 
오늘날 역전이에 대한 주류적 이해 - 역전이가 분석 상황에서 불가피하다는 점, 역전이의 초기 개념이 프로이트의 "극복" 권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 역전이가 분석가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보다 환자나 분석적 상황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역전이가 분석가의 가장 잠재적인 치료 수단이라는 점 - 의 맹아는 195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전이에 대한 거의 모든 현대 이론들 현대분석학파와 대상적 관계 학파, 대인관계 학파를 포함한다 - 위한 선례들은 객관적 역전이 사고에 대한 위니코트의 옹호 후에 등장한 역전이 문헌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역전이 현상을 조사하고 탐구한 분석가들 중에서, 역전이가 환자에 대한 정보의 가장 중요한 원천일 뿐만 아니라 분석가가 소유한 가장 강력한 치료 수단이라고 주장한 파울라 하이만 (Paula Heimann)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녀는 역전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문들 중 하나 (Heimann, 1950), 1949년 취리히에서 개최된 제 16회 국제정신분석대회에서 발표하였다. 그 당시 문헌상으로 이루어진 거의 모든 후속적 논의들은 그녀의 견해를 인용하였다. 하이만은 역전이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 견해에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처럼 시작한다:
 
나는 본 논문의 목적상 분석가가 환자에게 경험하는 모든 감정들을 포괄하기 위해 "역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용어의 이러한 사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며, 역전이가 단지 분석가의 전이를 의미할 수 있지만, 나는 접두사 "-"이 추가적 요소들을 암시한다고 제안한다.
 
계속해서 그녀는 다음처럼 말한다:
 
나의 주제는, 분석적 상황에서 환자에 대한 분석가의 감정적 반응이 그의 작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분석가의 역전이는 환자의 무의식을 연구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이만은 분석가 자신의 분석 목표가 순전히 지적인 해석을 수행하기 위한 무감각적 기계적 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분석 과제의 수행 중에 유도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강조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만약 분석가가 감정의 상담 없이 작업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그의 해석은 빈약해질 수 밖에 없다" 그녀는 개인적 분석을 거치고 유아기 갈등과 불안을 다룬 분석가들이야말로 환자들이 그들에게 투영하는 다양한 역할로부터 생겨나는 역전이 감정들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논의한 역전이가 환자로부터 나오며 분석가의 미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내가 강조한 관점에서 볼 때, 분석가의 역전이는 분석적 관계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환자의 창조물로서 환자 인성의 일부분에 해당된다. (p. 83, 강조는 원문의 것임)
 
계속해서 그녀는 역전이 극복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평이 분석가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갈등에 대한 분석으로 이끈다는 통념을 반박하였다.
주장컨대, 분석가가 자신의 역전이를 인식해서 정복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요구는 역전이가 혼란적 요소이기 때문에 분석가가 이로부터 분리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감정적 반응을 환자의 무의식에 대한 열쇠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석가에 의해 유도된 감정들의 강도 문제에 접근하면서, 하이만은 감정들의 강도를 제약하는 것을 지지하였다 (비록 분석가들이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단지, "폭력적 감정들은 사색보다 행동을 압박할 뿐만 아니라 증거를 정확히 관찰하고 중시할 수 있는 능력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분석가의 감정적 반응이 강렬하다면 그만큼 목적을 좌절시킬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 논문의 핵심적 주제가 역전이는 분석적 상황에서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만은 분석가에 의한 환자로의 전이가 존재하며 이것이 역전이로 불릴 수 있지만, 이러한 현상이 완전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주요 요소도 아님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을 정신병자와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경우로 확대시켜 논의했다는 점에서 위니코트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녀는 역전이에 대한 이전의 견해들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면서, 다음처럼 말했다:
 
나는 내가 여기서 시도했던 관점으로부터 역전이에 대한 더 철저한 조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현실에서 역전이의 성격이 환자의 무의식적 충동과 방어에 대응되는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이만은 이 논문과 이후 논문들에서 환자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 이외의 용도로 역전이를 사용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환자에게 부여될 수 있는 해석을 정식화시키는 것이 유용하다고 암시하였다.
 
"역전이와 그에 대한 환자의 반응" (1951)은 위니코트 (1949)와 하이만 (1950)의 논문들에 대한 마가레트 리틀 (Margaret Little)의 대답이며, 존 로젠 (John Rosen)의 작업에 대한 동시대적 논의이다. 리틀은 역전이를 이용하지 않는 것이, 역전이의 가치를 수용하지 않은 초기처럼 정신분석의 발전에 유해한 효과를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록 그녀가 그 개념에 대한 위니코트의 정의를 받아들인다고 언급하였지만, 그녀가 객관적 역전이를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리틀은 역전이의 정의보다 용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일정한 정도의 탐구를 수행하는데, 역전이와 역저항을 명시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제외하고 최종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그 논문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이다.
 
그녀는 환자에게 역전이의 언어화 (verbalization)를 제안했지만, 두 지점 - "시기를 놓치거나 잘못 강조된 해석의 모호한 효과를 중화시키는 것"과 종료 문구 - 을 제외하고 이러한 언어화의 여부와 이유, 시기, 방식에 대해서는 다소 모순적이면서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1957년 논문에서 리틀은 분석가의 어떤 반응이 분석에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는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더 확실한 개념에 도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자신의 사고를 정교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녀는 "여기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오직 한 단어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 많은 의미를 포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 당시 정신분석학계 내에서 역전이에 대한 사고의 혼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역전이를 두 개념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이 단어에 부여된 감정적 부담과 혼란을 감소시키려고 하였다. 그녀는 다음을 의미하기 위해 역전이를 사용하였다:
 
환자가 분석가에게 전이시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환자에게 부여되는, 분석가 자신에게서 지금까지 분석되지 않은 억압된 요소들, 즉 환자가 분석가를 그 자신의 부모로 여기는 것처럼, 분석가가 환자를 (일시적이면서 가변적으로) 유아로 여기는 것에 속하는 것
 
그런 다음 그녀는 역전이가 오직 일부분에 해당되는 두 번째 개념을 정의한다. 그녀는 이것을 다음처럼 정의하면서, 상징 "R"로 부른다.
 
환자의 욕구가 무엇이든,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이 무엇이든, 환자의 욕구에 대한 분석가의 총체적 반응; R은 의식적인 모든 것뿐만 아니라, 억압된 것으로 구성된 무의식적인 모든 것 (정상적이든 병리적이든)을 포함하며, 그 외에 결코 의식적이지 않은 많은 것까지 포함한다. 다시 말해 R은 분석가의 자아와 초자아, 이드에 속하는 것들을 포함한다 (p. 241, 강조는 원문의 것임)
 
리틀은 분석가의 책임과 감정의 관점에서 이 개념을 정교화시켰다. 그녀는 경계성 장애나 성격 장애가 분석가에게 가장 커다란 어려움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경우 분석가는 치료를 위한 총체적 책임을 떠맡는 것이 중요하다


참자기 정신분석 심리치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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