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문제로 생기는 비참함, 절망, 경직, 혼란, 무기력, 우울함에 관하여... > 칼럼 및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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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및 수필

정체성 문제로 생기는 비참함, 절망, 경직, 혼란, 무기력, 우울함에 관하여...

참자기 2014-06-29 (일) 17:07 10년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쾌락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는 고대에서부터 철학적 화두였다.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을 생물학적으로 조명해보면  감각 충족을 통한 만족감이 쾌락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사람의 정신과 신체의 유기적 관계에서 생기는 현상에 대해 연구한것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자기보존 본능인 초기 유아의 구강욕구의 충족, 배설욕구의 충족, 성적욕구의 충족 그리고 점차 성적인 대상으로 충족 순서로 발달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이렇게 끝없이 쾌락의 절정을 쫒아야만 하는가? 이러한 쾌락과 행복을 원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러한 근원적인 '나'라는 정체성의 문제는 생물학적인 '나'를 넘어서는 논제이다. 
 
사람에게 쾌락을 얻는 신체적 감각과 내적인 감각들은 동일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같은 조건에서 동일한 경험을 했을지라도 쾌락과 불쾌함은 각각 다르게 반응하며 경험한다. 이것은 개인의 성장배경, 감정패턴, 성격구조, 무의식 등 개인의 주관성으로 인해 신체적인 외부감각과 정신적인 내적 감각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고 지칭하며 지각하는 '자아'의 구조는 모두 다른 형태를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명인들은 메스컴을 통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쾌락을 얻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자랑하듯 현혹하며,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비를 통해 감각을 충족하면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광고한다. 물론 한 사회구조 안에서 유사한 생각과 행동 그리고 가치관을 지니고 소비 생활에 충족할 때 생기는 안도감 (나와 타인은 다르지 않고 동일하며,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 중이야) 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이것들은 모두 위선적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라는 주관적이며 고유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한 사람의 깊은 심연에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내적인 상황은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위선의 탈을 벗어버리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찾고자 하는 욕구로써 각각 다른 형태를 가지고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뻔하고, 무기력해지고, 무엇을 해도 재미 없고, 의미 없으며, 혼동이 경험되기도 하며, 우울과 짜증을 동반한 알 수 없는 분노 그리고 각종 정신질환이라고 부르는 형태로써 삶과 자신 그리고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불평과 분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상황은 깊이 숨겨진 자신의 참자기를 찾아야 할 문제로써 '나는 누구이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동반한다. 또한 '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져와 비참함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만성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P. Giovacchini 의 글을 일부 요약하고 인용하면서 '나'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생기는 정신현상들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만성적인 비참함과 절망감에 대해서[1]
 
자기 정체성이 빈약할 경우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불안, 우울을 사용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증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체성이 빈약하게 구조화된 환자의 경우는 불안은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불안은 신호불안 이외에도 자기표상의 응집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불안으로도 존재감이 결핍된 상태인 정체성의 균형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처음에는 혼동, 공허감을 경험하지만 점차 테러(terror)로써 극도의 공포감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포는 살아있다는 느낌인 생존과 관련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공황증(panic attack)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극심한 불안으로 인한 공포상태에 관해서 클라인(M. Klein)은 멸절불안(annihilatied anxiety)의 수준으로 봤으며 위니캇(D. Winnicott) 은 이러한 불안에 대한 개념을 확장시킨다. 그는 유아가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안정감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멸절 불안에 사로잡힌다고 봤다. 유아의 존재감은 아주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방해만으로도 이 시기에서 유아가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존재감은 위협받을 수 있다. 유아에게는 경고 신호로서의 불안을 관리할 수 있는 자기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불안은 멸절 불안으로 경험된다. 결과적으로 이 단계의 유아는생각할 수 없는 불안”(unthinkable anxiety)의 가장 자리에서 살아간다.
이렇듯 멸절불안은 유아가 태어나서 경험하는 존재감의 결핍으로 인한 공포로써, 자신이 해체되어서 사라질 것 같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형태인  테러(terror)를 사용하는 것이다. 지오바치니(P. Giovacchini) 는 멸절불안이라는 용어대신 테러(terror)이라는 용어로 사람의 우울에서 경험하는 근원적인 비참함과 절망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테러가 신호불안처럼 유사성이 있다고 봤다. 자아의 항상성을 확립하려는 시도, 즉 살아있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로써 자아의 해체를 보호하고자 하는 일종의 신호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테러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동하는 것이고, 자아는 해체되지 않도록 복원하는 힘을 가동시킨다. 자아는 테러를 무한정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자기표상을 회복시킴으로써 더 성숙한 방어를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의 자기표상은 편안한 균형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기에 비참함 느낌의 고통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안은 두 종류가 되며 각각의 변화과정이 있다. 첫째, 심리내적 갈등에 의해 생기는 불안은 붕괴되는 공황상태로 이어지고 이것을 막기 위해 방어가 작동된다. 둘째, 더 성숙한 방어기제는 자기의 회복을 위해 자기표상을 응집하려 하지만 실패할 때 테러인 공황상태가 된다. 이때 테러는 자기의 응집성을 재 형성하기 위한 신호가 되며, 이것이 성공할 때 비참함과 절망감으로 자기에 대한 절망감과 응집성을 유지하게 된다.
 
환자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몰두해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절망감과 비참함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준다.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대신 치르는 댓가는 모든 좋은 경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쾌감이 없는 상태라는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때 심리내적 자아는 기쁨을 느낄만한 것을 지원 할 수 없게 되며, 자아의 에너지는 정체성을 지탱하는 것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성적 절망감과 비참함은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만들고 테러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이끌지만, 본질적으로는 여기에서 파생되는 고통스럽고 붕괴되는 정서의 경험은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게 하는 적응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테러는 자신을 학대하는 가학증이나, 고통과 징벌을 통해 죄책감을 완화하려는 시도와는 다르다. 가학과 죄책감을 완화하려는 시도는 결국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인데, 만성적 절망과 비참함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테러는 자아의 붕괴를 막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만성적인 경직과 우울함에 대해서
 
우울환자의 일부는 사고가 상당히 경직되어 심리내적인 구조에서 전체적인 조망을 하지 못한다. 이들의 정서적 범위의 한계는 타인의 정서적 뉘앙스를 알거나 경험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에 관한 통찰능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자신의 비참함의 원인을 자신의 환경이라는 경직적인 상황이나 사건에서만 찾을 뿐 심리내적인 세계와 전혀 연결시키지 못한다.
 
우울환자의 자아는 상대적으로 초기발달 단계로 퇴행되어 있기 때문에 자아의 하위체계들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추상적 사고를 포함해서 더 높은 단계에서 기능하는 자아의 장치들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울증 병리의 일부의 퇴행상태에서 자아는 경직성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물론 많은 환자들이 초기 유아단계로 퇴행하지만 이후에 획득한 모든 기능들이 상실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울환자들은 획득한 좋은 자아 기능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원초적이고 경직된 사고모드로 되돌아가는 것이 특징적이기에 만성적인 우울환자는 추상적 사고기능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이들은 심리내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강박적 특성을 가지고 외부 세계의 작은 것에 몰두하는 것이 두드러지는데, 우울상태에 있을 때의 행동과는 달리, 사업, 여행, 스포츠, 게임, 조직화된 지적 활동에 매우 많이 관련되어 있으며, 삶은 외부로 향해져 있고 사색적인 고독을 피한다. 외향적인 이들의 활동을 언뜻 보면 우울과 거리가 멀게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감각인 우울에 대한 방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환자들은 지적 능력과 특성이 뛰어나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노력은 비약과 피상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심오하거나 내적 성찰을 하는 것도 조사해보면 피상적이고 매우 단순한 것으로 밝혀진다.
 
비참함과 절망감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의 경험을 방어하기 위한 이러한 조증(manic)상태는 전능한 자아 이상화(igo-ideal)라는 융합의 특성이 있다. 자기 표상의 응집성이 있는 이상, 손상된 자율성이 지속되어 경직성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기능이 병리적일수록 자기표상을 경직되어 정체성이 감소할 것이며, 자기표상이 균형 잡히고 유연할수록 더 적응적일 것이다. 자기표상의 형성은 자아구조를 공고화하는데 자아경계가 세워지고 외부세계와 내부세계가 구별되어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써 내적 세계인 마음의 다양한 작용을 관찰할 수 있으며 인지적 영역에서는 추상적 사고를 폭넓게 할 수 있는 기능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잘 구조화된 정체성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클라인(M. Klein)은 우울적 자리를 통과할 때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된다고 봤는데 이곳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자아능력이 결핍될 때 언제나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여 경직된 사고인 퇴행적인 지점으로 되 돌아간다. 우울적 자리가 해결될 때 대상과 상황들은 전체적으로 인식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언제나 부분적으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대상항상성은 부분대상에서 통합적인 전체대상으로 갔을 때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경직성은 우울한 환자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특성이며 결함이 있고 갈등적인 자기표상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연약한 자아(ego)의 해체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조증 환자의 경직과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조증 환자의 경우는 과대망상적 지배력과 관련된 승리감을 방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우울환자의 경우는 자기의 다양한 부분들을 경험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 부분들이 특정 방어로 사용되어 서로 관련 있지만, 조증 상태처럼 병적 쾌락을 동반하거나 전능감을 유지한 채 조종하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다.
 
정신적 어려움이나 심리적 고통은,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에 대한 부조화이다. 이것은 어쩌면 개인의 주관성과 특수성을 무시하고 보편적인 감정과 생각 가치관을 종용하는 이 세상에 대한 반발일수도 있다. 이러한 내적 여행에 초대되어 떠나는 것은 그리 즐겁고 상쾌하며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 동안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정신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매우 두려운 경험이며 그 과정은 내적 용기와 인내가 참으로 필요하다. 이때 숙련된 치료사인 정신분석가는 이러한 개인의 내적 고통 때문에 생기는 현상들을 연구하는 동시에 개인의 주관성과 특수성에 대한 변형을 꾀한다
  
 
'나'라는 정체성의 기반은 애초에 성격구조로써 연약하게 자리잡을 수도 있고, 살아가면서 외부환경의 시련을 통해 큰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거나 혹은 방법을 몰라서 선택했던 거짓자기로써 '나'의 정체성은 물거품처럼 허물어져 정신과 현실의 삶에 큰 어려움이 생긴다. 정체성이 희미할 때 경험되는 주관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의식적인 정신적 방어로써 무기력, 좌절, 우울감, 희망없음, 비참함, 혼란, 공포, 두려움, 혹은 중독이나 매닉(manic)하게 들떠있는 기분 등은 만성적으로 사용한다. 이때 대인관계는 공허하며, 의미 없고 생명이 고갈된 만남이 지속될 수 밖에 없고 삶은 점차 지옥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울' 또는 '조울증', 성격장애 및 정신질환을 단순히 신체적인 호로몬 문제로 여기고 약물로 치료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각자 사람들이 고유한 '나'로써 자아형태는 기질, 성격, 감정과 행동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자아'의 구조는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따라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외부세계의 경험, 예를 들어 대인관계나 특정한 감각을 경험하지만 내적세계에서 생기는 감정, 느낌, 환상과 의미가 희미하거나, 왜곡되거나,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정체성 혼란이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내적 세계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은 내적인 세계인 정서와 의미의 세계가 외부 세계인 대상들을 감각하며 관계를 조화롭게 맺을 수 있는 성숙한 '자아'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것은 상호관계에서 '당신은 내 마음 안에 의미와 감정, 환상으로 살아 있으며 동시에 외부에 살아 있는 독립된 고유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는 정체성이 견고하지 않다면 즉, '자아'가 연약하다면 사람은 현실이라는 삶에서 진정한 쾌락과 행복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게 된다. 참으로 갈망하지만 붙잡거나 머무를 수 없는 쾌락과 행복을 취하기 위해 일생동안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한다. 


[1] The miserable patient : affective disorders / P. Giovacchini
Peter Giovacchini, The Miserable Patient: Affective Disorder, From Treatment of Primitive Mental States, pp. 261-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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