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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및 수필

병리적인 나르시즘(자기애)적 사람과 관계 1

참자기 2013-11-24 (일) 19:53 10년전  
흔히 공주병, 왕자병이라고 불려지는 나르시즘적(자기애)인 사람들은 모두 정서적으로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의존적이었을때 통제를 당했거나 순수와 헌신이라는 가면 뒤에서 조종을 당했던 나르시즘(병리적 자기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자신이 통제되었거나 조종당했던 경험들이 성격적으로 고착되었고, 일상에서 정서적으로 가까워진 사람에게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르시즘적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이용당하거나 착취당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나르시즘 성격의 사람과 안전한 정서적 거리는 얼마큼 유지해야 할지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나르시즘으로 성격이 조직된 사람과는 정서적으로 가까워질수록 통제, 조종, 무시, 그 반대로 지나친 칭찬과 이상화를 경험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르시즘적 사람과 정서적 관계를 맺으면 이상화 때문에 자신이 거대하게 느껴지거나 평가절화되어서 불쾌한 기분이 들것입니다. 나르시스틱한 사람의 자아의 정서적 핵은 수치감과 공허감으로 가득 차 타인의 칭찬과 정서적 반영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존재감)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타인을 높게 이상화 하기 위해 갖은 미사여구 혹은 순수하게 보이는 헌신을 보여주며 자신과 동일시 하며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수치심을 숨기고 낮고 텅빈 공허감을 채웁니다. 하지만 이상화했던 타인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이상화가 벗겨지면 그동안 상대를 이상화 한만큼 평가절하를 합니다. 더이상 이상화했던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 해도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타인은 평가절하되어 무시, 비난, 통제, 군림하려는 태도를 보이거나 때로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차없이 단절시키기도 합니다. 그동안 이상화했던 타인은 나르시즘적 사람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 인격적 관계는 전혀 맺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년 전 치료를 종결을 한 60대 중반의 남성 환자가 치료도중 한 말입니다.  
: 중략 (타인과 관계에서 경험한 불쾌함에 관해서 얘기를 하는 중에…)
: 혹시, 선생님과 저 사이의 관계도 불쾌한 감정이 있나요?
: 난 치료 초기에는 신 선생님(치료자)을 정말 어려워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려웠던 마음이 점점 없어졌어요. 그동안 내 삶을 돌아보면 나의 모든 관계는 그동안 순응적이거 복종적이었고 아니면 권위적이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난받고, 무시 받을 것이고 나 자신도 무능해진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난 평소에 사람들보다  항상 우위에 있어야 된다고 느꼈어요. 내가 사람들보다 위에 있지 않는다면 굴욕감을 느끼면서 복종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선생님은 달랐어요. 나의 말을 존중하고 내가 느끼는 것에 관해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어요. (침묵...) 나는 그런 경험을 지금까지 해 본적이 없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왜 피곤하고, 불편하고, 혼란스러웠는지 그리고 집에와서 잠을 자야 했는지 그 정체를 알것 같아요.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이 왜 나를 싫어했고 이중인격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사례의 환자는 나르시즘 사람에게 그동안 비난과 평가절하를 받아왔으며, 이것은 자신의 성격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유아기부터 나르시즘적인 사람의 희생양으로 살아오면서 느낀 혼란과 무기력 텅빈 공허감에 대한 정체가 치료과정에서 서서히 나타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렇게 나르시즘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피곤함과 혼란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나르시즘적인 사람에 의한 피해자일 뿐 아니라, 자신도 나르시즘적 성격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현대의 사회문명은 사람과의 정서적 관계의 중요성이 높게 평가받기보다 개인의 기능이 사물처럼 평가되고 사용하다가 필요없으면 버려지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문명속에서 나르시즘적 성격이 많아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르시스틱한 부모는 자신의  삶의 공허와 낮은 자존감을 보충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녀를 대합니다. 아직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독립할 힘이 없는 자녀는 부모의 정서적 나르시즘적 정서를 사랑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분노는 무의식에 억압합니다.  
   부모로부터 나르시스틱한 성격과 정서적 문제를 대물림 받은 자녀는 어쩔 수 없이 혼란과 공허 속에서 자신의 수치심을 숨기고 현실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저주의 쳇 바퀴에 편성된 것입니다. 나르시즘적 성격이 학벌이나 사회적 위치가 높거나 똑똑해 보여서 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성격이 더 많이 몰려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권력, 명예, 인기, 지적욕구, 돈 이란 사람들의 부러움과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낮은 자존감과 공허감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열망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까지 악착같이 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타인을 비난하고 무시하면서 자신의 낮은 자존감이 우월해지는 기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나르시즘적 사람은 직장에서, 선후배 관계나 친구관계에서, 가족 안에서, 심지어 종교단체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정서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하면서 자신의 우월감을 자랑하거나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나르시스틱한 성격이 아닌지 의심해보세요.
 
   나르시즘적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감과 공허감를 채우기 위해 오늘도 당신을 비난과 무시하며 평가절하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르시스틱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당신을 이상화 하거나 칭찬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칭찬하는 반응으로 되돌려 주는것이 좋습니다. 만약 당신을 평가절하 하거나 비난한다면 부드럽게 대항하십시요.  너무 강하게 맞서거나 나르시즘적 사람의 숨겨진 정서적 진실을 드러낸다면 더 큰 보복을 감수 해야 할 것입니다. 나르시즘적인 사람과는 정서적으로 가볍게 만나고, 가능하면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나는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당신은 나르시즘적 사람이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보충하기 위해 자기자랑 하는 말을 계속 듣거나, 당신에 대한 무시와 평가절하 혹은 남의 험담(평가절하)을 들으면서 맞장구 쳐야 할 것이므로 점점 화가 나는 경험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나르시즘 사람들은 자신의 공허를 채울 진정한 관계를 갈망합니다. 사람에 대한 강렬한 갈망은 블랙홀과 같아서 누구든 빨아들여 먹어치우고 더 이상 가치가 없다면 뱉어버리는 이러한 소용돌이에 누구든지 쉽게 말려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르시즘의 사람과는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어느정도 포기해야 합니다. 만약 관계를 포기 할 수 없거나 멀리 할 수 없다면 스스로 피학적 성격을 의심해야 해봐야 합니다. 피학적 성격은 자기 자신이 평가절하, 비난, 가학을 받으며 피해자가 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피학적인 성격은  타인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더 인내할 수 있고 희생하는 것을 통해 자기만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학적 성격은 나르시즘적 사람들의 희생양으로 빈번하게 사용됩니다.  
 
나르시즘적 사람에 관해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실제로 당사자는 언어로 형언 할 수 없는 허무감과 공허, 수치감과 혼동은 영문도 모른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내적 고통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인 아기의 시절 정서적으로 중요한 양육자와 관계 실패가 성격으로 고착된 성격적 질환이기에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의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르시스틱한 성격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 아기였을때 조직화 된 질병이기에 프로이트도 치료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만, 최근에 들어 현대분석에서 치료적 성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참자기 정신분석 심리치료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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